'협력의 새시대' 여는 한국과 러시아
러시아는 2000년 5월 등장한 푸틴 대통령의 리더십에 힘입어 각 분야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며 정치의 안정과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시현하고 있다. 국제무대에 있어서도 유럽의 일원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고, 미국과 폭넓은 전략적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도 협력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국제질서 중심축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국제사회는 러시아를 장래 중동에 버금갈 ‘세계의 주유소’로 주목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중국간에 벌어지고 있는 동부시베리아 석유수송 루트 쟁탈전은 세계 최고의 에너지 소비증가율을 보이는 동북아지역 에너지원 확보 경쟁의 전초전에 다름 아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날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앞으로 극동 시베리아 개발이 본격화될 것임을 예고하는 동시에, 북한문제를 포함한 우리의 대(對) 동북아 전략, 그리고 이 맥락에서 추구해야 할 대 러시아 협력관계 구축의 방향성을 시사해 준다.
한국과 러시아는 1990년 수교 이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85년에 걸친 외교 단절의 부(負)의 역사를 청산하고 폭넓게 실질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러관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두가지의 낭보가 있다. 첫번째는 경협차관 협상의 타결이다. 수교 당시 구소련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한반도 긴장완화를 목적으로 14억7천만달러가 제공되었고, 그간 현물과 방산물자 등으로 일부 상환되었으나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변제가 지연되어 연체이자를 포함한 원리금이 22억4천만달러로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김진표 경제부총리 방러시 연체이자 중 6억6천만달러를 감면하고 나머지 15억8천만달러를 리보+0.5%의 금리로 향후 23년간 분할 상환키로 합의하였다.
이번 채무 재조정 합의에는 12년여를 끌어온 현안이 해결되었다는 사실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러시아에 대한 우리 금융기관의 신규 지원이 가능해졌으며, 이미 수출입은행이 이번 합의와 동시에 러시아의 우량 민간은행에 8천만달러의 전대차관을 공여키로 하였다.
따라서 현재 30억달러를 상회하고 있는 두 나라간 무역이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임은 물론, 1백억달러 이상 규모의 코빅틴스크 가스전 개발과 수송망 건설, 30억달러가 소요될 TKR·TSR 연결, 나홋카 공단 건설, 사할린 에너지 개발사업 등 대형사업에 우리 기업들이 유리한 조건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두번째는 우리나라 우주실험용 과학기술위성 1호가 최근 러시아의 우주기지 플레세츠크에서 러시아제 코스모스 3M 로켓에 실려 발사된 사실이다. 현재 한·러간에는 과학분야에서 다양한 협력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금년 5월에는 러시아의 과학연구소가 집중되어 있는 노보시비르스크 및 톰스크와의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양 도시에 한·러과학협력센터를 설치하였다.
두 나라간의 경제, 자원, 과학기술 협력 외에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위한 조력자라는 관점에서도 러시아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현재 동북아 평화와 안정의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의 핵개발 문제이다. 러시아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하에 6자회담에 참여하고 있으며 북한에 대해서는 핵무기 개발 포기를, 미국에 대해서는 북한의 안보우려에 대한 배려를 촉구하고 있다.
이제 한·러관계는 양자 차원을 넘어 지역 차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두 나라는 20세기 동북아의 역사를 점철한 갈등과 대립의 구조를 협력과 상생의 구조로 바꾸기 위한 역사적 실험의 한가운데 서 있다.
〈정태익/주 러시아 대사〉